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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부산 광복동에 문을 연 음악감상실 무아(無我)는 7090부산젊은이들의 아이콘이다. 부산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영남 일대와 멀리 서울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서울MBC DJ로 일세를 풍미한 박원웅 선생은 무아음악실을 다녀간 뒤 종로2가에 음악다방 무아를 만들면서 부산 무아의 허락 하에 상호를 쓴 걸로도 유명하다. 영화 [열애]의 주인공 배경모(MBC)를 비롯해 지명길(작사가), 석송(CBS), 유문규(MBS), 강동진(MBC), 강민(이영철,MBC), 이창환(이창주,MBC), 김현화, 이은경, 최길락(최인락, MBC), 유대영(서태지와 아이들을 발굴한 음반기획자), 유경수, 정진(정인회, MBC), 이상민(MBC), 박현미, 박태수, 정병호, 윤주은, 윤영균(변영균, CBS), 설리진 등 수많은 인기DJ를 배출한 DJ사관학교였다. 지금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추억으로 남은 무아이야기를 연재한다. 필자 최인락(데일리기장뉴스 기자/ 전 부산MBC별이빛나는밤에, 현 TBN부산교통방송 DJ)은 1980년 4월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무아에서 DJ로 일했다. 이 내용은 페이스북 페이지 무아음악실(www.facsbook.com/mua7090)에서 옮겨왔다. -편집자 주
무아의 현판을 재현한 모작으로 강만호 작가가 나무에 새겼다.(사진=페이스북 무아)무아에 가장 손님이 많은 날은 언제였을까? 계절별로는 겨울, 봄, 가을, 여름 순이었던 것 같다. 겨울은 바깥에 특별히 다닐 만한 곳도 없었거니와 무아에 오면 따뜻했다. 소리가 분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네 벽을 모두 커튼으로 둘러싸기도 했거니와 이 시기에는 객석 한가운데 석유난로를 가동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110평 넓은 홀에 석유난로 하나만 있으면 온기가 가득했다. 홀 중심에 열십자로 나 있는 통로 사이에 위치한 난로 주변 좌석이 겨울에는 가장 명당자리였다. 이 좌석들은 여름에도 인기가 있었는데 대형에어컨의 바람 방향과도 일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무아의 구조를 대강 설명하면 이렇다. 입구로 들어서면 입장료를 받는 카운터 겸 주방이 있었다. 그 뒤로 작은 휴게실이 있어서 차도 마시고 전화도 받을 수 있었다. 4층까지 걸어 올라온 손님이 돈을 내고 커튼을 열어젖히면 극장식으로 배치된 좌석이 있었고 가장 먼 쪽에 음악실(DJ박스)가 있었다.

무아의 위치는 광복동 쪽에서 용두산공원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두 건물이 붙어 있었다. 당시 광복동은 부산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기록하고 있던 미화당백화점 주변을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돼 있었다. 좁은 땅에 건물 간의 사이를 두지 않고 지음으로써 용적률(?)을 높였다.

그렇다 보니 입구는 양쪽에 각각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마치 한 건물인 것처럼 보였다. 1층과 지하는 두 건물을 터서 쓰는 신라민예사가 자리했다. 2층은 1980년 이전에는 수다방이 두 건물을 터서 사용했지만 1981년경에 분리가 되면서 한쪽에는 부동산 사무실, 한쪽에는 음악다방인 수다방(나중에 면적이 절반으로 줄어 목촌다방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수다방이 됨.)이 있었다. 3층에는 일본어학원과 미용실(조희미용실)이 각각 있었고 4층이 두 건물을 터서 쓰는 무아였다. 두 건물이 60평과 50평 정도여서 둘을 합친 무아는 110여 평의 큰 면적을 차지했다.

두 건물인 관계로 화장실도 왼쪽과 오른쪽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왼쪽, 오른쪽은 입구에서 음악실(DJ박스)을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오른쪽 화장실은 화장실로 사용했고 왼쪽 화장실은 마치 방처럼 개조가 되어 있었다. 오른쪽 화장실은 남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하나는 숙녀, 하나는 신사용이었다. 입구쪽에 세면대, 칸막이 너머로 신사용 소변기가 있었다.

불과 두어 평 남짓한 화장실이었고 좌변기가 설치된 칸은 남녀구분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안에서 누군가가 힘주는 소리가 들렸고, 서서 볼일 본 신사가 지퍼를 채 올리기 전에 성급하게 돌아서면 화장실 문 앞에 기다리던 숙녀와 눈길이 마주치기가 다반사였지만 아무도 흉보지 않았던 훈훈한 시절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금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상상에 괜한 웃음을 지어본다.

무아에는 단골도 많았지만 처음 오는 음악팬들로 넘쳐났다, 필자는 물론 DJ들은 가끔 싱거운 멘트를 날렸다.

“무아에 처음 오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구조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곳은 음악실, 영어로 스튜디오(Studio)입니다. 어떤 분들은 ‘박스’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큰 라면박스가 있습니까? 이게 박스면 저는 라면입니까?”

여기저기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자는 너스레를 떨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이 늘 문제인데요. 가끔 어떤 분들이 이 스튜디오 문을 열면서 화장실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문을 열고 화장실을 찾으시기에  입구 쪽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조금 뒤에 다시 와서는 '휴지 좀 주이소.' 해서 제가 참 난감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화장실은 입구에서 음악실 쪽으로 직진하다가 중간쯤에서 살짝 꺾으면 있습니다. 큰 거, 작은 거 모두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들으면 전혀 우습지도 않고 아재개그 축에도 속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멘트였지만 처음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여기저기 사용료를 내고 들어가는 공중화장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포동파출소(지구대?) 앞에 하나 있었고, 세명약국 근처 국제시장 0공구 지하, 충무동 근처 또 구덕야구장 버스정류장 앞에도 대형 공중화장실에 가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무아에 처음 오는 분들은 화장실을 찾기가 참 어려웠다. 무아는 입구에 들어오면 입장료(찻값)을 미리 받는 카운터가 있었고 암막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커튼을 통과해야 좌석과 스튜디오가 눈에 들어오는 구조였다. 또 좌석은 기둥에 설치한 꼬마전구의 불빛과 천장에 설치한 간접조명을 제외하면 조도가 낮았다.

흔히 보는 ‘화장실’이라고 불을 밝힌 작은 간판도 없어서 *야구르트맨들에게 화장실을 묻는 분들이 많았다. 눈썰미가 좋은 분들은 용케 단번에 찾기도 했지만 대개는 물어물어 화장실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데 가끔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야구르트맨에게서 물어 화장실 위치를 알아낸, 처음 오는 손님이 중간에서 꺾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면 알텍스피커 뒤쪽에 있는 스튜디오 입구로 오게 돼 문을 열고 DJ와 맞딱뜨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 DJ최: 이번에 준비한 노래는 딥퍼플이 1968년에 발표한...
■ 처음 온 손님: (음악실 문을 빼꼼 열고는) 저 처음 왔지 말입니다. 그래서지 말입니다. 
□ DJ최:(당황하며 마이크 켜진 것도 잊은 채) 뭐... 뭐하시는 겁니까?
■ 처음 온 손님: 저... 뒤가 많이 급해서(대사 순화 처리)...
□ DJ최: (애써 태연한 척하며) 도로 나가셔서 왼쪽입니다. (손님들 폭소, DJ 다시 멘트한다.) 딥 퍼플은 영국출신으로서...
(이때 다시 문 열리며 아까 그 손님 목소리 들린다.)
■ 아까 문 연 그 손님: 저 휴지는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디서 팝니까?
이런 장면을 한번이라도 본 손님들은 DJ가 ‘화장실 사용료는 무료입니다.’라는 멘트를 하면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손님들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DJ멘트를 듣고 웃어대는 옆 좌석 손님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이해 안 되는 손님: 이거 뭐 무아가 수준 높다는 소문 듣고 와 봤더니 뭐 이래? 썰렁썰렁...

무아에 손님이 많은 날은 언제일까를 이야기하려다가 화장실 이야기로 새고 말았다. 나머지는 다음 편에서 또 기억해보자.

*야구르트맨
무아는 입장료(찻값)가 선불이었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면 입장권(메모지/리퀘스트 용지)을 주는데 한쪽 귀퉁이를 잘라서 서빙하는 이에게 주면 음료수를 마실 수 있었다. 


무아는 1971년 8월 1일(일설에는 7월 11일이라고도 함.)에 문을 열었다.

1981년 이전까지는 겨울과 봄에는 커피와 직접 끓인 생강차 등을 제공했고 여름과 가을에는 커피와 오렌지쥬스(분말을 물에 탄) 중에 선택하여 마실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81년에 2대 사장님이 커피와 야구르트 한 개로 대체하였다.

필자가 처음 무아에 입사를 했던 1980년 4월에는 '숙자 씨'라고 불리는 마음씨 좋은 여성이 정갈한 유니폼을 입고 차를 제공했다. 1981년에 제공하는 음료수가 빨대를 꽂아서 주는 야구르트로 바뀌면서 총각들도 ‘알바’를 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야구르트맨’이라는 호칭이 등장하였다. 야구르트맨이 남긴 전설도 다양한 관계로 그 이야기도 다음 기회로 미룬다.

**오류 지적이나 건의사항 댓글 환영합니다.
***나가기 전 무아에서 듣던 노래 한 곡 남깁니다.
Johnny Cash - I Walk the Line(1956)
“I find it very, very easy to be true”
Johnny Cash - I Walk the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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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7-19 22: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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